top of page

나의 어린 파우스트에게

  • 작성자 사진: dearmyfreshmanself
    dearmyfreshmanself
  • 9월 17일
  • 2분 분량
(사진 출처: 서울대학교 사진갤러리)
(사진 출처: 서울대학교 사진갤러리)

너는 오늘도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고 있구나. 공부가 마음처럼 되지 않아 한탄하기도, 귀한 지식을 손에 넣어 기뻐하기도 하면서. 너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너를 마 주보며 서 있단다. 나는 누구일까? 미래의 너? 사후의? 유령? 그도 아니라면 성가신 잡 념? 모르긴 몰라도, 나는 네게 한낮의 악마처럼 나른하고 권태로운 목소리이겠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네가 제일 먼저 했던 다짐을 기억하니? 넌 세상의 모든 지식을 네 것으로 만들 양 서슬 푸른 기세가 등등했었어. 파우스트가 따로 없었지. 그랬던 어린 파 우스트가 이제 힘이 다 빠져서 책은 내팽겨친 채 신선놀음만 하고 있네. 인간을 쥐고 흔 드는 난폭한 환상들이 미워져 대놓고 허망한 것들만 사랑하기 시작한 관계로. 이를 테 면, 춤이나 봄이나 새나 시, 한 글자로 아름답고도 박명하게 발음하는 것들. 하지만 놀 랄 만한 사실을 하나 더 알려 줄게. 너는 책 대신 다른 것을 읽게 되었단다. 어쩌면 책 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읽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어.


사람의 눈동자가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니? 우리의 마음이 강 따라 흘러 가고 있다 는 사실은? 숨에도 만져지는 질감이 있다는 것, 별의 상속을 받은 우리 안에서 때때로 튀어나오는 빛이 있다는 것도. 그래서 세계는, 네가 그토록 궁금해하는 세계는 같은 것 하나 없이 매 순간 새로 태어나고 있단다.


네가 어릴 적 상상했던 대로 잠을 자면서 우리는 죽음을 통과하는 지도 몰라. 지난한 하 루의 삶을 거쳐 윤회한 아이의 눈으로 아침을, 허망한 하루 끝 관 뚜껑을 봉인하는 마음 으로 밤을, 몇 번이나 통과하면 우린 진정 만나게 될까? 9가 0을 거쳐 다시 1이 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일까? 모르긴 몰라도, 그날이 오면 난 내가 배운 것 중 가장 좋아하 는 방식으로 널 환대할게. 드디어 크게 소리 내어 웃는 법을 배웠거든. 마치 창자 속에 서 팝콘이나 팡파르가 터지는 것 같아. 물론 어느 쪽이든 상관없을 테지.


부디 오해하지 않길 바라. 나는 네게 무엇을 가르치러 온 것은 아니니까. 우리는 결국 만나 하나가 될 운명인데, 누가 누구를 가르칠 수 있겠어? 나는 다만, 너를 응원하고자 이곳에 왔단다. 앞만 보며 달리고 있는 어린 파우스트가 더욱 힘차게 달릴 수 있도록. 그렇게 계속 달려 하루 빨리 나의 품에 뛰어든다면, 난 널 부둥켜안고 우리 중 누구도 모르는 미래의 세상으로 찬연히 데려갈 거란다.

 
 

© 2023 Institute for Hope Research. All rights reserved.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