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고려대학교 커뮤니케이션팀)
2018년의 너에게
다시 생각해봐도 네가 그때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렸던 건지 나는 잘 모르겠다. 너도 잘은 모를 거라고 생각해.
남들은 잘 모르겠지만 너가 내색만 안 할 뿐 감수성이 참 풍부한 아이라는 걸, 나는 잘 알아. 홀로 상경해서 처음 목격했던 강남역의 수많은 인파, 그중에서도 네 눈을 사로잡았던 건 8번 출구 계단에서 동냥하던 노숙자였잖아. 그걸 보고 차오른 동정심에 SNS에 업로드한 한 편의 시는 수많은 남고 동창들의 놀림감이 되잖아.
그런 네가 고향을 떠나 친구 하나 없이 쓸쓸하게 대학 생활을 하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측은한 마음이 들어. 학기 초 학과 행사를 따라갔다 술집 사장에게 빠른년생인 걸 걸린 이후로 넌 어떤 술자리에도 따라가지 않았지. 그런데 너
가 진짜 무서웠던 건 그 술집 사장이 아니라 술자리에서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너 자신이었잖아.
그래서 대학교 사람들과 어울리길 포기하고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을 찾아가지만, 그들에게마저 ‘대학 생활 부적응자’로 낙인 찍혔다는 것을 깨닫고 기숙사 방에만 틀어박혀 외로움과 씨름하고 있잖아.
그런 너를 격려해 주고 싶다만, 너가 원체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같은 진부한 격언 따위에 감동받는 성격이 아니어서 말이지. 차라리 화제를 돌려 네가 향후 6년 간 맞이할 미래를 간략히 소개해 볼게.
놀랍게도 너의 그 고독은 신입생을 마치자마자 끝나. 2019년에 2학년이 된 너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신입생들이 참여하는 학과 행사에 열심히 얼굴을 비치지. 그 덕에 마음에 맞는 친구를 여럿 사귀게 돼. 난생 처음으로 사랑도 해보게 된단다. 그러니 막역한 친구들과 애인을 두고 2020년에 입대해야 했던 그 심정이 어땠겠어. 군 생활은 역시나 녹록지 않았고, 애인과도 결별하게 되지만, 그래도 너는 2021년에 후임들의 박수를 받으며 전역하게 돼. 전역 이후인 2022년부턴 공부에 흥미를 붙여 전 과목 A+를 받고 유리 벽돌을 수상하는 쾌거까지 누리지. 그리고 2023년에는 네가 군 생활 때부터 꿈에 그리던 교환학생에 합격해서 미국으로 오게 돼. 이 1년 간의 교환 생활도 어느덧 끝에 다다라 한 달 뒤면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어때, 인생사 참 모를 일이지? 다이나믹하게 펼쳐질 네 미래를 듣고 네가 많이 당황스러울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놀랍게도 전부 네 손으로 이루게 될 일들이란다. 그러니 힘든 시간을 잘 버텨준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하지만 너한테 원망스러운 부분도 있어.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이과생이었던 너가 대학교 원서 제출 2주를 남겨두고 돌연 철학과를 가겠다고 결심한 탓에, 졸업을 목전에 둔 나는 아직도 뚜렷한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단다. 너도 이미 많이 들었겠지만 이공계열 졸업생보단 철학과 졸업생이 훨씬 취업하기가 어렵잖아. 이혼한 부모님은 각자 독신으로 늙어가시는데 나는 아직 취업을 할지 공부를 할지조차 결정하지 못했어.
그래서 지금의 내가 보기엔, 가고 싶은 철학과를 주저 없이 지원했던 그때의 네가 참 대단해 보여. 주변에서 뭐라고 말하던 자기가 가고 싶은 길을 가던 용기와 자신감. 지금까지 쌓아온 노력을 뒤집어엎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결심하면
곧바로 실행에 옮기던 결단력. 6년 동안 난 많이 성장했지만 그 자신감과 결단력만큼은 잃어버린 것 같아.
그러니 나는 나의 문제에 처해 있고, 너는 너의 문제에 처해 있는 셈이야. 내 입장에서 너를 바라보고, 네 입장에서 나를 바라보면 이렇게 쉬운 문제가 또 없는데 말이지. 아쉽게도 인간은 현재에만 갇혀서 살아가므로, 우리는 각자의
문제가 불가해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야.
하지만 그 문제에는 정답이 있어. 다만 그 문제는 오롯이 너 혼자 해결해야만 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렇게 전달되지 않을 편지를 쓰며 너를 응원하는 것 뿐이야. 이 편지를 다 쓰면 나 또한, 너 입장에선 너무나도 쉬울, 내 문제를
풀러 가봐야 해. 만약 네가 이 편지를 읽는다면, 낑낑대면서 문제를 풀고 있을 나를 격려해 주었으면 좋겠네.
그럼 이만 마칠게.
2024년의 재원
우리가 각자의 문제를 풀어내길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