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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게 아무것도 조언하지 않으려고

(사진 출처: 고려대학교 커뮤니케이션팀)

2022년을 그림 그리면


약수역. 3호선에서 6호선으로 환승하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곳이다. 약수역을 지나치던 아침, 저녁마다 얼마나 다양한 감정이 스쳤는지 몰라. 지금이야 학교 근처에서 살고 있으니 그곳을 지날 일도 거의 없어졌지. 새내기 시절 나의 등굣길, 그때는 그마저도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몰라. 지금 생각해보면 지하철 타고 오는 등굣길도 재미있었는데. 문득 약수역을 지나니 그때의 내가 떠올라 이 글을 쓰게 되었어. 2024년의 과학 기술로는 시간 여행을 할 수도, 지나간 과거를 지워버릴 수도 없어. 누군가는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시간 낭비라고 할지도 몰라. 그래도 오늘 이 순간만은 2022년 새내기 시절의 나에게 용기 내서 말을 건네보려고. 그동안은 나조차도 나의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괴롭고 어려웠는데, 내가 아니라면 그 시간 속 너를 봐줄 사람이 없잖아. 그래서 또 다른 미래의 내가 이 편지를 읽고 위로 받을 수 있게 오늘은 과거의 네 얘기를 해보려고 해.


2022년의 너에게 고려대학교는 어떤 의미였어? 나의 기억으로 그때 너는 분명 네가 세상을 다 가진 줄 알았었지. 2022년에는 코로나19로 비대면으로 개강을 했는데도 너는 부지런히 학교에 갔으니 말이야. 새 학기, 3월의 봄, 길가에 피어있는 민들레조차도 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었지. 나의 인생 2막을 이 학교에서 시작할 마음에 매일매일이 엄청 설레었지. 그 설렘은 나의 목표를 이룬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기도 했어.


대학교에서 본 세상은 네가 여지껏 알던 세상과는 정말 달랐지. 네가 대학교에 온 걸 제일 먼저 실감한 순간이 언제였냐고? 다른 순간들도 많았지만 SK미래관의 라운지를 처음 봤을 때가 아니었어. 웃기지?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학교 의자와 탁자들이 그렇게 소중했었다니. 세련되고 멋진 건물에서 모두들 자유롭게 할 일을 하는 모습이 내 심금을 울렸거든. 친구들과 빨간색의 고려대 잠바를 입고 길거리를 활보하고, 막걸리와 함께 추억을 마셨던 모든 시간들. 중앙광장 잔디에 앉아 짜장면을 먹던 만우절, 그리고 축제 입실렌티때 다같이 교호를 외치던 우리들의 외침은 잊을 수가 없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일거야. 네가 고려대학이라는 집단에 속해있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거든. 되려 그 의식을 나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네 자신을 더 좋아하게 되었지.


그런데 대학 합격이라는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던 것 같아. 스무 살의 나는 너무도 큰 변화를 맞닥뜨렸던 걸까? 너도 알겠지만, 내가 그렸던 목표는 사실 그리 구체적이지 못했거든. 고등학교에서는 그저 주어진 일을 해내느라 고려대학교에 와서는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생각할 시간이 부족했었지. 그런 와중 그 시절 나에게는 대학은 고등학교와는 차원이 다른 지식을 배워야 한다는 환상이 있었던 것 같아. 강의 내용이 조금만 쉬우면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했고, 아이러니하게도 조금만 어려우면 지레 포기했거든. 입학식 날 넘쳐 나던 열정은 온데간데없고, 점차 그런 태도들은 나의 일상이 되어갔어. 꽤 많은 시간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면서 보냈던 것 같아. 열심히 놀지도, 공부하지도 않고 시간이 흘러가는 걸 모르는 체했지. 모두들 한 방향을 바라보던 고등학교와는 대학교는 명백하게 다른 곳이었어. 각자 다른 꿈과 사정들은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지. 그래서 평생 한 적 없던 일탈도 했었잖아. 학교에도 출석하지 않고 방 침대에 누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날들이 있었지. 무기력한 네 자신은 스스로를 더욱 고립되게 만들었겠지. 사람 만나기 좋아하고 외향적인 성격인 나로서는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하겠지만 말이야. 남들이 보면 한 번의 수능으로 원하는 대학교에 진학한 멋진 성취를 이룬 너였지만 남들이 보지 못하는 네 한 구석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던 거야.

그땐 누구보다 기댈 곳이 필요했었던 것 같아. 그걸 너도 알고 있었을까? 그 시절 너는 술 마시고 아무에게나 푸념을 털어놓는 네 모습에 많이 실망했지. 스스로를 자책하고 미워하며 갉아먹었던 것 같아. 그런데 있잖아, 돌이켜보면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야. 네 잘못도,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힘들고 방황하던 순간이 있었기에 오늘 내가 나의 무게를 짊어질 수 있는 근육을 키워나간 거지. 그러니 이제는 그때의 나를 너무 미워하지 말자. 미래의 어느 날 이 편지를 다시 읽으면서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을 때까지 나의 과거를 잊지 않고 보듬어주려고.


매년 봄, 4월이 되면 학교 캠퍼스에는 만개한 붉은 꽃들 사이에 나비들이 날아다녀. 선선한 봄바람과 함께 붉은색 과잠바를 입은 신입생들을 볼 때면 자연스레 과거 생각이 나지. 남들보다는 다른 새내기 시절을 보냈던 나라도, 이제는 모든게 새로운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어. 학교 지리가 익숙하지 않아 지도를 켜고 걸어다니던, 약수역에서 지하철을 놓쳐 짜증이 솟구치던 순간들 모두 되돌릴 수 없는 거거든. 그 순간들이 불행하다, 행복하다 같은 한 단어의 형용사로 표현하기에는 너무 많은 감정들이 있었어. 그래서 나는 미래를 다 알지만 네게 아무것도 조언하지 않으려고. 너의 모든 실수는 경험이 되고, 후회는 배움이 될 테니까. 이제 나는 그때의 너를 이해할 수 있거든. 스무 살의 나는 많이 어렸구나. 많이 아팠구나. 그냥 그랬던 거구나.


순간에만 누릴 수 있는 감정은 오롯이 네 것이니 훗날의 내게도 그 감정들이 소중한 선물로 돌아오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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