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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라는 거야.


(사진 출처: 고려대학교 커뮤니케이션팀)


안녕, 지원아.


우리가 알고 지내게 된 게 벌써 23년이나 되었네. 너는 아마도 나의 가장 오래된 벗이자, 또 한편으로는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이지. 그렇지만 제일 막역한 사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막상 너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본 적은 없는 것 같아서 이렇게 글을 쓴다. 너와 헤어진 지 벌써 4년이나 흘렀어. 돌이켜보면 아쉬운 순간도 많고, 후회되는 순간도 많았던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너와 함께해서 꽤 즐거웠어.


남들보다 1년 늦게 대학교를 입학한 2019년의 봄, 그때 너는 아직 이지원이었지. 입학하자마자 캠퍼스 로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는 동기에게 ‘종강’이라는 냉소적이고도 씁쓸한 대답은 마치 그때의 이지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다. 13년간의 입시생활동안 목표로 삼아왔던 고려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너는 여전히 묘하게 불안함을 느끼곤 했었지.


항상 입버릇처럼 ‘내 꿈은 대학생’이라고 말하고 다녔고, 그리고 결국 그 꿈을 이루고 나니까 무엇을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은 거였을 거야. 게다가 길고 긴 입시생활을 끝마치고, 모든 것이 다 자유로운 대학교 생활 사이의 괴리감때문에 방황하기도 했었어. 게다가 2년간의 입시생활동안 하루에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홀로 공부해왔던 탓에 결핍된 사회성 때문에 다른 학우들과 섞이기도 힘들었을 거야.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멋진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었는데, 막상 섞여 들어가려고 하니 어딘가 벽이 느껴졌겠지. 점점 학교 안보다는 학교 밖에서의 생활이 편해졌을 거야. 왜 그런 말 있잖아, 애매하게 아는 사이보다는 아예 모르는 사이가 낫다고. 그래서 너는 학교 안에서 어색하게 지내기보다는 그냥 혼자 집에 있는 선택을 하게 돼. 게다가 아직 너는 모르겠지만 1년 후에 세계에 전염병이 돌게 되면서 너는 2년 동안 집에서 강제적으로 칩거하게 돼(소설 같은 얘기지만 놀랍게도 현실이야). 그 때문에 인간관계는 거의 단절이 되어버렸고, 사회성도 점점 낮아지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많이 떨어지게 돼.


나는 그와 관련한 네 선택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고 싶지 않아. 앞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가장 오래 알아온 벗이니까. 나는 네 선택을 항상 존중해. 설사 네가 나중에 후회를 하게 되는 선택이라 할지라도, 당시에는 어떤 이유이던 간에 그것이 네 최선의 선택이었을 테니까. 그게 설령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나태함이나 방관, 또는 현실도피처럼 느껴지는 선택이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나만큼은 네 편을 온전하게 들어주고 싶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네 편이 아니더라도, 나는 네 선택을 존중하고 언제나 지지할 거야.


그러니까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너를 향한 어쭙잖은 충고도, 또는 좀 더 열심히 살아보지 그랬냐는 책망도 아니야. 나는 그저 나의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것뿐이야. 네가 학교 밖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넓혔던 것처럼, 4학년이 된 나는 학교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살았어. 눈치는 이미 챘을 것 같지만…개명을 한 것도 이 즈음이야. 지난 22년간 이지원으로 산 시간은 좋았지만, 앞으로 남은 인생은 한 번 직접 지은 이름으로 살아보고 싶어졌거든.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는 거라고 하잖아? 나는 그 새로운 시작을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부터 나아가보기로 했어. 이름을 바꾼 이후 때마침 전염병 시국도 좀 잠잠해지게 됐어. 이후에는 발로 뛰면서 많은 교수님들과 면담을 했고, 다양한 학우들과 만나면서 시야를 넓혔지. 게다가 네 유일한 캠퍼스 로망이었던 교환학생도 다녀오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


내가 스포일러 하나 해줄까? 그 교환학생 경험은 네 기대 이상으로 훨씬 더 행복했고 유익할 거야. 너는 앞으로 인생에서 힘들 때마다 꺼내서 들여다보는 추억 한 조각을 항상 간직할 수 있게 됐거든. 아는 사람 하나 없이 간 교환학생이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적극적으로 사람을 만나려는 노력을 할 수 있게 됐고, 사람을 사귀는 것에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고, 심지어는 이역만리에서 혼자 살아가는 법까지 터득할 수 있게 됐어. 짧은 기간동안 열심히 여행도 많이 다니면서 세계가 얼마나 넓은 지 알게 된 기억은 아마 두고두고 추억할거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너무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라는 거야. 네가 비록 스스로가 너무 나태한 것 같고, 뒤처지는 기분이 든다고 하더라도 꼭 그렇지는 않아. 너는 아직 어리고, 정말로 가능성이 많고. 당시에 하지못한 일들은 나중에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으니까. 인간관계가 너무 좁은 것 같다며 주눅들지도 말고 항상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어. 언젠가는 기회가 반드시 찾아오고, 나는 네가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거든. 마냥 어두워 보이기만 했던 진로 계획의 갈피도 어느 정도 잡기 시작했어. 지금 네가 못할 것 같아보이더라도 미래의 내가 해낼 테니까 걱정말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후회없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길 바랄게.

2월의 마지막 밤에,

제윤이가.

추신: 그래도 운동은 좀 해라. 확실히 20대 초반이 근육이 제일 잘 붙는 시기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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