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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색깔을 보존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사진 출처: 고려대학교 커뮤니케이션팀)


HB20에게.


3년 전의 나에게 편지를 쓰는 과정은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딱 3년 전이면 대학 합격 후 입학식이 취소되고 개강이 미뤄질 것을 모른 채 설레 있을 시기라는 것이 생각났습니다. 과거의 나와 설렘이라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얼마 전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잠>이라는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서 주인공이 과거의 주인공과 꿈에서 재회해 앞으로의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형식으로 서사가 전개되는데, 마치 당신과 나의 상황을 보는 것 같아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책의 형식을 빌려, 이 편지를 읽는 당신을 “HB20”, 이 편지를 쓰는 나를 “HB23”으로 칭하고자 합니다.


HB20, 당신에게 무언가 많은 말을 썼다가 모두 지웠습니다. 당신이 보내게 될 한 해가 어떤 해일지 미리 알려주고 싶었는데, 그것이 당신의 인생을 재미없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패를 통해 성장하는 나의 특성을 당신 역시 가지고 있을 것이기에, 탄탄대로를 걷게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것이 그쪽의 HB23을 나보다 더 성숙한 존재로 만드는 데 일조할 것 같아 훈수 아닌 훈수를 몇 가지 두려고 합니다. 내가 HB20이었을 시절에 주위의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해 주었다면 그쪽의 HB23이 아니라 HB21이나 HB22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쪽의 HB21과 HB22는 자아를 찾는 데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같은 트랙을 달리고 있는 선발주자가 후발주자에게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 준다는 생각으로 읽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괜히 이쪽의 HB, 그쪽의 HB라는 표현을 써서 헷갈릴지도 모르지만, 동일인물일 것입니다. 단지 당신에게는 그것이 미래이고, 나에게는 그것이 과거라는 점이 유일한 차이점이겠네요.


첫 번째로, 당신은 절대 완벽할 수 없습니다. 시비를 거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이렇게 말을 세게 하지 않으면 당신의 마음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이쪽의 HB20은 “육각형 인간”이 되기 위해 목맸습니다. 게임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고, 예체능에도 소질 있는 고려대생이 되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주위 사람들의 선망 어린 눈빛을 받고 싶어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한 마리의 토끼도 잡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을 말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년이라는 시간을 통째로 쏟아붓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색깔”(이 단어를 당신이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을 죽일 뿐 아니라 과거의 추억의 색깔마저 죽일 것입니다. 과거의 영광은 과거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말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플로어볼 선수였던, 마술사를 희망했던 HB들을 당신의 현실로 어떻게든 소환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편지를 쓰다 보니 또 마음이 약해져 버렸습니다. 과거의 HB를 불러오는 것 자체를 악한 행위라고 보진 않습니다. 다만, 그것에 1년을 투자하는 것은 그리 수익성이 높은 투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저 원할 때 가끔씩 꺼내보는 취미 정도로만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쪽의 HB는 취미 이상으로 완벽함을 추구한 탓에, 우울의 늪에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완벽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내면의 기둥을 갉아먹은 탓에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습니다. 무너진 내면을 재건하는 데 2년이 걸렸습니다. 자신의 욕심이 자신을 갉아먹어 자신을 무너뜨리다니, 지금 보면 참 한심한 짓거리입니다.


두 번째, 나와 남의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를 갖추기 바랍니다. HB23인 나도 그러한 자세를 갖춘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종종 흔들리긴 합니다. 남들과 추구하는 길이 다름에도불구하고그들이 꿈을 좇는 과정을 그대로 밟는 것은 역시 HB21의 내면을 짓밟았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CPA 강의나 각종 공모전 수상 경력이 아니라 몇 권(혹은 몇십 권)의 책들과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에 대한 숙고일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색깔을 세상의 색깔에 희석시키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색깔을 안에 품고 있으려고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당신의 색깔에 대해 호의적이지, 절대 적대적이지 않았음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글이 됐든, 사진이 됐든, 어떻게든 “기록”의 형태를 띨 수 있는 무언가를 통해 당신의 색깔을 보존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같은 색깔을 여러 번 덧칠하면 그 색깔은 점점 더 짙어집니다.


미래에 대한 스포일러를 최대한 줄이려고 했지만 적다 보니 몇 가지가 새어나와 버렸습니다. 그래도, 지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걸 통해서 당신이 자신감을 갖게 된다면 그 활자들이 차지한 자릿값은 그 자리 이상의 가치를 가질 것 같네요.


결국 엄청 긴 글을 당신에게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꼭 곱씹어서 읽어보고, 다시는 안 올 새내기 생활을 좀 더 외향적으로 만끽했으면좋겠습니다. 이만 고학번이 되어버린 저는 말 줄이겠습니다.


2023.02.

HB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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