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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할 수 있기에 네 일상이 빛나는 거야.


(사진 출처: 고려대학교 커뮤니케이션팀)


20살 재희에게,


개강을 앞두고 일기장을 뒤척이던 중, 정확히 이 년 전, 그러니까 재작년 3월 1일에 적힌 글을 발견했다. 게을러터진 내가 쓴 것치고는 꽤 정성을 들인 것 같아 눈길이 갔고, 난 호기심에 종이를 훌훌 넘기던 내 손놀림을 멈췄다.


조금 구겨진 종잇장엔 퍽 당찬 다짐과 앞으로 펼쳐질 이십대의 삶에 대한 설렘이 가득 담겨 있었다. 천천히 훑어 내려가던 중 그 당시의 생활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고, 글의 작성자가 누군지도 기억이 났다 — 대학 생활을 잔뜩 기대했고,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상심을 금치 못했던 스무 살의 나. 그래 너 말이다.


우선, 네가 궁금해할 소식을 적어 보자면, 애석하게도 넌 인싸가 되진 못했단다.

잠시 진정하고, 온갖 험한 말을 뱉으면서 이 편지를 내던지기 전에 조금만 더 경청해줬으면 좋겠다.


넌 지금 어릴 적부터 그려온 것과는 다른 대학 생활을 겪고 있겠지. 글에 적힌 바램과 달리 동기들과 친목을 쌓지도 못하고, 열정으로 전공 공부나 다른 어떤 활동에 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쉬고 노는 것도 아니니, 어딘가 실망스러운 이 일 학년 생활을 온전히 코로나 팬데믹의 잘못으로 돌리고자 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난데없이 나타나 수많은 이들의 일상을 망가뜨린 범세계적 감염병을 탓하는 건 자기 성찰에 비한다면 아주 쉬우니까. 하지만 그럴듯한 이 핑계마저도 유통기한을 다하는 날이 올 거야. 대면 수업이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도, 넌아마한동안무기력한채로있을걸? 좋아하는 봄이 다시 찾아와도 넌 맞아줄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 같아. 콕 집어 형용할 수 없는 상실감이 늘 내재하여 있었고, 넌 때론 상황과 환경, 또 다른 때엔 자신을 원망했지.


이즈음 되니 혼자 끙끙 앓고 있을 네가 머릿속에 그려져 마음이 편치 않네. 조금이나마 마음을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이 글을 끄적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너의 혼란은 현실과 기대 사이에서 오는 격차로 인한 것이야. 마치 줄줄이 이어지는 계단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달려 올라가다, 당연히 있을 거라 여기던 앞의 한 칸이 사라지고 발을 헛디뎌 구르는 느낌일 테지. 넌 계획적이고 성취하고자 하는 욕심도 많으니 활기찬 대학 생활에 대한 바램도 그에 비례하는 크기로 부풀었어. 그리고 그 기대에 못 미치는 대학 생활을 맞닥뜨릴 때, 넌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았지.


“남들은 소위 ‘코학번’임에도 불구하고 다 보람찬 대학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럴까? 의미 있는 대학 생활을 보내려면 대체 어떡해야 하는 걸까? 왜 난 끊임없이 실패할까?”라고 넌 자주 생각했지. 정석적인 궤도를 홀로 이탈한 것 같아 쩔쩔매며 자책하는 너에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전하고 싶어. 네가 좇고 있는 건 신기루이니 말이야.


애초에 넌 왜 이 많은 걸 애타게 바란 걸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봐. 많은 친구를 사귀고자 한 것은, 타인에게 너를 있는 그대로 떳떳이 드러낼 수 있는 자존감을 키우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대학에서 많은 활동을 하거나 공부를 잘하고자 욕심낸 것은, 아마 네가 좋아하는 분야에 깊이 몰두하는 경험을 하고 싶기 때문이야. 마음 편히 쉬고 놀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늘 자기혐오와 불안에 눌려 일상을 누리지 못한 너의 마음을 조금 더 돌봐주고 싶었기 때문일 테지.


네가 대학 생활에 대한 환상을 품은 것은, 변화하고 성장하는 너 자신의 모습을 바랐기 때문이야.


이것 봐라, 찬찬히 살펴보니 대학에서 뭘 하는지는 생각보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무엇”보다는 “왜”라는 질문에 먼저 답해. 그 무엇보다 너의 동기가 제일 중요해. 고등학교와 달리 대학에는 질서정연한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확실히 알고, 그 앎을 바탕으로 너의 길을 직접 개척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난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외부에서 찾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너의 바람과 내면을 뜯어내고 꼼꼼히 해체해봐. 오직 너 자신만이 이뤄줄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거야. 시시각각 변해가는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기대할 순 없을지라도, 그 가운데서 네가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싶은지는 분명한 너의 자유야. 이 사실을 마음에 새겨.


“무엇”을 “왜” 하느냐에 대한 분명한 답을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자연스레 떠오르는 방식 그대로 행동해. 너의 믿음과 선택대로 도전하고 실패하는 것이 타인을 애매하게 흉내 내는 것보다 값진 경험이다.

완벽한 기회나 계기를 기다리지 마. 그러다가 이십 대 다 지나간다. 너의 대학 생활은 앞으로의 삶의 기반과 방향성을 다지기 위한 시행착오의 장이야. 당장 성과를 낼 수 없어도 괜찮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니까. 넌 아마 머뭇거리겠지. 뭘해도실패하는것같고, 혼란스럽고, 자신도 없으니 말이야…이 마음을 극복하는 방법은 정면 돌파뿐이다. 그냥 해. 결과보다 과정에 더 중점을 둘 때 넌 성장할거야.


마지막으로, 넌 이런 생각을 자주 했었지: “언제 즈음이면 난 정말 홀가분하고 행복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아마도 영영 그럴 일은 없다. 적어도 네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이뤄지지 않아. 하다못해 네가 돌봐주고 있는 7살 난 아이도 하기 싫은 숙제나 자신을 바보라고 칭한 못된 친구 때문에 진지하게 번민하는데, 너라고 아무런 걱정도 없는 정적인 일상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어쩌면 네가 그토록 바라던 잔잔한 삶은 실체가 없는 환상에 지나지 않고, 네가 하찮다고 여겼던 너의 모습만이 진짜일 수도 있다. 평생 성공보다 실패를 더 많이 경험할 수도 있어. 하지만 얼마든지 너의 이상을 향해 달려갈 수 있고, 도전할 수 있기에 네 일상이 빛나는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난 지금도 보기 좋은 직선의 그래프를 그리며 매일 발전하는 진취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어. 미래의 너는 완벽히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으니, 보람차고 행복한 대학 생활을 지속하는 비결을 끝내 알아냈으니, 희망을 품고 마음 편히 살라 전하지 못해 미안하다…그리고 아마 이렇게 나 자신과 씨름하는 일상은 이번 학기에도,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오래 계속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난 이제 난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있어. 돌고 돌아 난 내 갈 길을 찾았고, 네가 이런 나를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좋겠어. 나도 널 자랑스럽게 생각하거든.


지금 네가 잘 못해내고 있단 걸 알아. 하지만 난 널 원망하지 않아, 네 편이니까. 널 믿어.


추신,

아직은 바람이 차지만, 봄이 다시 찾아오고 있다. 신입생들이 들뜬 마음으로 학교를 누비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덩달아 설레는 요즘이야. 그 친구들을 보며 널 더 자주 떠올리게 될 것 같기도 하다. 나의 후배 되시는 분들은 행복한 한 해를 보내시길 마음속으로 축복하며, 그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든든한 선배가 되어가는 상상을 조심스레 해본다.


2023.03.01

22살 재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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