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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을 견디고 살아주어 고맙다

(사진 출처: 유홍현 동문)


안녕 오랜만에 너에게 말을 건다. 정말 가까운 기억인데, 지나온 시간을 숫자로 확인하니 15년도 더 되었네. 그동안 잘 지냈니?

     

너를 떠올리면 처음 서강을 간 날이 기억나.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려 거리 수북이 흰 눈이 쌓인 날이었지. '전복에 대한 상황을 기술하라'던 문제가 왜 그리도 어려웠던지, 마음 졸이며 어떻게든 글자 수를 채우려 애쓰던 그날의 시험 시간이 기억나. 떨어질 게 분명해 눈물을 훔치며 돌아갔던 길도.


정말 기뻤던 합격이었는데,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던 날 어찌나 어색하고 힘이 들던지. 어설펐던 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울리지 않은 화장을 하고, 벙벙한 옷을 입고선 낯선 동기들 사이에서 두리번댔었지. 대학은 고등학교 때처럼 노력하지 않아도 한 공간에서 매일 동기들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크게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친구가 생기는 일은 더는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어.

         

내 식대로 시간을 구성할 수 있는 자유는 스물의 너에겐 다루기 버거웠던 것 같아. 공강 시간이면 기숙사에서 혼자 포장해 온 밥을 먹던 네가 기억난다. 자유가 주는 홀가분함보다 처음 받아 드는 백지의 시간 앞에서 몸살을 앓듯 외로워했지. 어떻게 시간을 살지 몰라 마음 잃고 헤매던 숱한 시간은 상상으로는 미처 알지 못했던 대학 생활의 현실적 얼굴이었다.


서울은 왜 그리도 넓고, 화려하고, 큰지. 사람들은 왜 그리도 많은지. 스물의 너는 학교 주변만 다니는 데도 마음에 체기가 오는 것 같았지. 스스로를 꾸밀 줄도 모르고, 다양한 나이와 고향의 사람들과 섞여 대화할 줄도 모르고, 뭐든 잘 해내고 싶은데 현실에선 늘 허둥대고 서투른 모습만 내보여야 하던 걸 퍽 서러워했지. 나는 왜 이럴까 하고.


합격만 생각했을 뿐 '대학 생활'이 담고 있는 광활한 세계를 너는 알지도, 예상하지도 못했어. 그저 낯선 환경과 사람들이 주는 위압감을 온몸으로 겪는 수밖에 없었지. 아무리 따라 해본들 초라한 스스로를 도돌이표처럼 마주해야만 했던 그 모든 슬픈 시간은 서강대와 서울이라는 공간이 준 게 아니었어. 그 슬픔은 실은 학업에 밀려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던 영역들을 직면한 데서 찾아온 감정이었던 걸 이제는 안다.

     

서투르고 초라한 모습을 내보이기 싫어 더 이를 악물고 자존심을 부리던 너의 눈빛이 기억나. 일부러 더 당당한 척하고, 허세도 부려가며 그 시간을 버티려 버둥댔었지. 그런 너를 이제 와 바라보면, 그 서투름도 귀엽고 풋풋한데, 서투른 그대로 보여도 괜찮았는데, 네가 느꼈던 것처럼 그렇게까지 못나지는 않았었는데, 네가 듣기엔 그냥 하는 말로 들리겠지? 정말 네게 필요했던 건 덜 초라해지는 게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진솔히 만날 수 있는 우정이 아니었나 싶다.


스물의 너에게 세상은 무엇이든 꿈꾸면 멋진 세계가 손에 닿을 것 같은 미지의 공간이었지. 어떤 사람을 만날까, 그 세계는 얼마나 멋질까 너의 마음 한구석엔 동화 속 어느 반짝이는 세계를 향한 부풀어진 기대가 있었다. 지금에서 너를 보면, 이미 너에겐 멋진 세계가 바로 곁에 찾아와 있었다는 게 보여. 서강에서 만난 동기와 선배, 후배, 동아리 사람들, 교수님, 그 수많은 사람 사이에 있던 너는 이미 반짝이는 세계 한가운데에 있었어.


나는 너에게 아주 고마워. 그 시간을 견디고 살아주어 고맙다. 서투를지언정 네가 밟은 그 걸음들이 쌓여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어. 서강이라는 공간은 스물의 너를 때론 무심히, 덤덤히, 그리고 한결같이 품어준 곳이었어. 너의 스물을 서강이라는 둥지에서 보낼 수 있던 건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스물의 너는 조금도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살고 있어. 나는 네가 있던 그해에 태어난 아이들과 함께 선생님의 이름으로 살고 있다. 지금의 나는 너에 비해 나를 많이 알고, 자주 행복해. 내가 이 아이들 사이에서 살 줄 알았더라면, 나의 스물을 그렇게 슬퍼하며 살지 않았을 텐데 생각할 만큼. 그래서 최근 들어 네 생각이 나곤 했어. 네가 걱정하는 것처럼 삶은 그리 무겁지 않아. 그러니 용기를 내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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