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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은 꼭 아스팔트에서 자란 새싹 같아요


(사진 출처: 최근우 동문)

결국은 나에게로 보내는 편지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일까, 나는 언젠가 배웠던 희망을 여전히 갈망하고 있다.


안녕, 왜인지 너를 보면 꼭 인사를 하고 싶어. 요즘 밥은 잘 먹고 다닌다는, 네가 직접 너의 입으로 말할 수 있었으면 해. 21년도 1월의 추운 겨울, 살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고, 손을 벌벌 떨면서 상담을 신청했지. 그때는 고작 21살의 너, 겨우 1학년을 마쳤어. 너의 자그마한 방에, 그것도 모서리 꼭 붙어서, 더 이상 눈물이 나지도 않는 눈을 어떻게든 뜨고 상담 신청, 상담 신청, 이 네 글자만 되뇌면서 신청했지.


네 집 긴 책상 왼쪽 벽에는 ‘생명 존중 서약서’라는 무시무시한 것이 붙어있지. 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듯이 한참을 바라보고, 공허함에 빠져 초점을 잃어. 한동안 바라보고 너는 다시 하던 일을 하곤 해. 빠져버린 그 공허함에서 너는 그때를 다시 회상하고 기억 속의 상담 선생님을 불러내 이야기하곤 하지.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리고 반가워요, 고은씨. 준비되면 이야기해요.

….



선생님, 선생님과의 서약이 생각나요. 생명을 가지고 서약하다니, 그것도 존중한다니. 서약서를 쓰면서, 쓰고 나서도 그걸 한참 보는데 왜인지 참 이해가 되지 않게 웃음이 났어요. 온종일 어이가 없다면서 웃었어요. 집에 와서 서약서를 벽에 붙이는데 그제야 눈이 풀려 한참을 울었어요. 사실은 되게 많이 슬펐어요. 제가 그만큼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걸 들켜버린, 증명 당한 날이었어요. 사실 맞아요, 저는 생명이 진귀한 걸 몰라요. 어쩌면 서약서를 쓴 지금도 저는 모르고 있어요. 생명이란 건 얼마나 진귀한 건가요? 존중받아야 할 것인가요? 심장의 뛰는 소리가 그저 귀에 박혀있지만 생명력은 하나도 없이 그저 울리고만 있어요. 저는 살아있나요?


고은씨, 어느덧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요. 새내기들을 대상으로 하는 ‘어울림’ 캠프에 참여했다고 했죠. 고은씨는 봉사자로 참여해 2박 3일 동안 같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고요? 네, 우연히도 같은 조에 저와 동갑인 23살 새내기 친구가 있었어요. 키도 크고 옷도 헐렁하게 입어 사실 첫인상은 꽤 무서웠어요. 특히나 새내기보다 우리 봉사자들에게 더 관심이 많았어요. 참 물음표가 가득한 친구였어요.


전 신기하게도 아프면서 얻게 된 한 가지가 있어요. 저와 비슷한 사람은 저와 꼭 닮은 눈동자를 가졌더라고요. 그 아이의 눈동자를 본 순간, 저는 알아차렸어요. 저와 참 많이 닮은 사람이라는 것을요. 망설임도 없이 먼저 손을 내밀어봤습니다. 같이 이야기하자고. 그 아이는 덤덤히 받아주었어요. 한참을 걸으면서 잔잔한 일상 이야기를 했어요. 사이사이 공존하는 공백에서 서로의 눈을 바라봤어요. 눈에서 눈으로, 서로를 느꼈습니다. 눈만 바라봐도 느낄 수 있었어요. 말하지 않아도 보이는 그의 흉터들이 저를 울렸어요. 그의 왼쪽 팔에 그을린 아픔과 오른손이 감각하는 희망의 갈망들. 더 이상의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손에서 뛰는 맥박 소리를 느꼈어요. 조용히, 그 소리를 귀 기울여 들으며 빠른 맥박 소리가 점차 안정될 때쯤, 고요한 그 자리에서 저의 심장 박동수를 높인 그의 한마디, 어쩌면 제가 중얼거리던 네 글자와 똑같은 말, ‘살고 싶어’.


제가 이해하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죠. 생명이 진귀하다는,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 살고 싶어요. 사실은 너무나도 살고 싶어요, 선생님.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들었던 ‘살고 싶다’라는 말을, 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어쩌면 제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그가 대신 해준 것이 아닐까요. 그의 말은 꼭 아스팔트에서 자란 새싹 같아요. 밟히고 뜯기더라도, 그럼에도 꼭 새싹을 키워나가 꽃을 피울 것만 같아요. 선생님, 이게 생명이지 않을까요. 어떤 상황이든, 그럼에도 생명은 진귀하고 존중받아야 할 것이라는 걸, 저는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요. 그와 함께 세상을 살아보고 싶어요. 어떤 세상을 살아갈지, 어떤 그림을 그려나갈지 너무 궁금해요. 기대돼요. 선생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셨죠, 우리는 모두 원을 그리며 살고 있다고. 그런데 그 원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이 아니라, 계속해서 앞으로 굴러가는 원이라고. 2년이 지난 지금도 저는 여전히 원을 그리며 살고 있어요. 어쩌면 삐뚤게, 어쩌면 동그랗게, 어쩌면 제자리일 수도, 어쩌면 앞으로 가 있을 수도.


결국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여요. 고은씨, 언젠가 배운 희망을 앞으로도 기억하며 살아가요. 선생님, 세상에 원망과 사랑밖에 몰랐던 제가 욕심 하나만 부려도 될까요? 모든 사람이 아프지 않았으면 해요. 엄청난 욕심이죠? 그럼에도 저는 과연, 모든 사람이 생명을 품고 살아갔으면 해요. 어떤 생명도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고은씨는 생각보다 많이 강해요. 고은씨가 사랑하는 세상을 용기 있게 살아 봐요, 우리.



….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칠게요. 언제든, 다시 찾아와요.


2023.2.20. 나의 너, 고은,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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