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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네가 견딜 수 있는 것만을 남겨준 덕에 올해를 살고 있어


(사진 출처: 최근우 동문)

안녕 신입생, 오늘 하루는 어땠니.


너의 오늘이 어떤 하루였는지 나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으니 나의 오늘을 말하는 것도 아주 무용한 시도일까? 그치만 나는 저번 주의 로또 당첨 번호나 최근 주식의 동향이나 곧 치를 첫 시험의 답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들과 아직 이어져 있고 어떤 만남은 아주 특별한지, 어떤 소비 어떤 선택 어떤 방향이 좋더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네. 네게서 내가 겪은 모든 것을 앗아

가고 싶지 않아, 우리는 영화를 볼 때도 스포일러를 피하곤 하잖아. 대신에 나는 오늘을 말하고 싶어. 그 중에서도 강한 귀납이 효력을 가진다는 것만 겨우 알려주는 것들을 말야. 있지, 오늘도 날은 추웠고 올 겨울도 첫눈이 내렸다. 나는 오늘도 산책하는 강아지를 마구 쓰다듬고 싶었는데 눈을 마주치는 걸로 만족했어. 오늘도 제로콜라를 마셨다, 고 썼는데 생각해보니 아직 제로콜라의 진가를 모르겠구나! 그래, 바뀐 것도 있어.


그렇지만 이미 너에게도 많이 바뀐 것들이 있지? 다 같이 일제히 달려온 길의 골인 지점에 서서 이게 이때까지의 시험과 무엇이 다른 거였는지 의문스럽기도 할 거야. 다들 곧 내려올 시상대의 작은 단차에 왜 이렇게 예민한 것인지도. 결승선에 도착해도 길은 여전히 이어지는데 이제는 발 밑이 아니고 허공에도 바다에도 길이 있다는 것이 보이지. 당도한 곳은 몸집만 커다란 애벌레들과, 여전히 몸집만 커다란 애벌레들이 하늘로 바다로 가려고 고치를 짓고 생살을 찢는 곳이야. 가지처럼 갈라진 이정표와 낯선 건물 이름을 외워가며 무사히 걸어나가고 있구나. 요란하게 반짝거리는 새 구두가 다산관 바닥을 밟고 걸어가는 소리가 들려. 나무 의자는 서늘하고 전자음의 종소리가 장장하다.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이제야 배우는 것은 꽤 재밌는데다 우쭐한 일이고, 많은 사람들이, 아주 다양한 형태와 빛의 스펙트럼을 가진 사람들이 눈 앞에서 반짝반짝거려. 같은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과 한강을 바라보는 방향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은 꽤 생경한 일이네. 더구나 너는 한동안 학교를 다니지 않았잖니, 골방에서 광장으로, 아니면 벌판에서 성 안으로 들어간 기분이겠어. 고정된 설정값이었던 것들이 변인이 되는 만큼이나 너는 다른 사람과 너를 다각도로 비교하게 되고 순식간에 너의 상대적 크기가 3D로 기록되지. 너의 한 단면을 골라보고 누르고 부정하는 사람들, 너무 새로웠기에 미처 물리치지 못했던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밀로 할게. 너의 시행착오 덕분에 내가 좀 더 똑부러진 사람이 되었거든. 그렇지만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너는 알고 있을 거야. 무엇이 네게 무례하게 받아들여지는지 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또, 아빠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도. 이미 다 알고 있지?


기껏 시간 여행의 힘을 빌려 놓고 추억 팔이만 하고 영양가 있는 예언은 하나도 없네. 그치만 아무리 네가 나라도, 신입생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꼰대 같을까 봐 조심스러워. 게다가 실은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수도 있을걸. 나는 이랑의 노래를 이제 이해하게 되었지만 더 이상 그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 짓지는 않는 것처럼 말야. 그러니 그냥 하던 대로 해. 술은 몸에 안 맞으니까 지금처럼 술자리 피해도 되고, 알로스 인형 에브리타임에 팔 거지만 입학식 때 사도 돼. 가고 싶은 곳 가고, 가슴이 두근거리면 돈이든 시간이든 쓰고, 쉬고 싶으면 좀 쉬고, 그냥 그렇게 올해를 살아. 네가 제로콜라를 먹었는지 아닌지도 흐릿할 만큼의 거리가 있는 우리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 너는 결국 내가 되어 조금 아쉬운 일은 있더래도 나를 사랑하고야 말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말래도 하겠지만 일단 걱정하지 말고, 궁금한 거 있으면 나한테 물을 생각하지 말고 언니나 학우들이나 선생님들한테 물어봐. 인터넷 검색을 제일 많이 하겠다만. 참, 서광회에서 너를 소개할 때 새내기가 아니라 19학번으로 고쳐 말한 거 고마워. 그래서 좀 더 네가 친근해.


19학번, 잘 살아, 잘 지내고. 난 네가 견딜 수 있는 것만을 남겨준 덕에 올해를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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