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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나도 잘 살아갈게

(사진 출처: 최근우 동문)

은수에게


스무 살의 은수야, 안녕?


너의 현재는 어디 즈음에 있을까? 익숙하지 않은 서울의 풍경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어린 티를 감추려 태연을 가장하던 어느 봄날일까, 아니면 수업에서 처음 접한 실존주의 철학을 곱씹으면서 삶의 이유를 찾으려 애쓰던 어느 가을날일까. 내가 쓰는 편지는 결코 너에게 닿을 수 없겠지만 네가 마음 속으로 부지런히 써 내려간 무수한 편지들은 여전히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내게 도착하고 있어.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의 책임을 오롯이 짊어져야 한다는 부담이 버거울 때, 잊고 지낸 상처가 여전히 아프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소중했던 사람이 떠나가는 것을 느낄 때. 그러한 삶의 순간에도 네 덕분에 나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소박한 일상을 잘 살아내는 것이 인생을 가장 잘 사는 것임을 잊지 않을 수 있어. 과거가 남긴 묵직한 짐들과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무작정 달아나지 않으면서도 초연하게 현재를 살아가겠다는 약속을 담아, 지난 날의 편지들에 대해 답장을 보낸다.


내가 가진 얼마 안 되는 다정함을 부지런히 한 곳에 모아 네 두 손 가득 쥐어 주고 싶다. 고마워, 은수야. 네가 지금까지 네 삶의 무게라고 여겨 짊어온 것들, 그것들이 분명히 네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고, 그런데도 꿋꿋이 너는 너를 잘 지켜온 게 맞다고, 말해주고 싶어. 우리가 바랐던 것처럼 시간은 공평하게 흘렀고 어린 날의 상처도 조금씩 흐려지더라. 영영 말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기억도 바깥으로 나와 몇 개의 문장이 되어 어설프게나마 말해지더라. 지나고 나면 별것 아닌 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간들이 그 위에 겹겹이 쌓이면서 조금씩 잊혀가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 그렇다면 망각은 축복인 걸까, 아니면 임시방편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징표인 걸까. 지나온 슬픔을 건강하게 잘 흘려보내되, 결코 잊어버리지는 않을게. 타인의 고통에 둔감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아마 내가 시험에 합격했는지 궁금하겠지? 우리의 오래된 목표였고, 그 일을 하면서 살아야 그나마 가장 실천적이고 덜 헛된 삶이 될 것이라는 이상한 신념 같은 게 있었잖아. 너는 지금도 언제 어떻게 시험을 시작할지 머릿속으로 고민하고 있을 텐데, 그 생각을 설명하는 말들이 어느새 과거형이 되어버렸네. 미안해, 나 시험에 몇 번 떨어졌고 이제 거의 다 왔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고민 끝에 그만뒀어. 그런데 사실 미안하진 않아. 너도 짐작하겠지만 나 정말 최선을 다했거든. 이제 다르게 살아야 할 때인 것 같아서 그만뒀어.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내 안에 남아있던 피해 의식과 자주 만났어. 나를 묶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언젠가부터 내가 안간힘을 써서 붙잡고 있는 것이 된 것 같더라.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싶은 마음으로 계속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절실하게 쥐고 있던 그 줄들을 어렵게 내려놓았고, 여전히 두 발로 땅을 딛고 잘 서 있어. 처음에 품었던 신념도 물론 큰 동기였고 그 자체로 옳은 것이었지만, 돌이켜보면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어. 성장 과정에서의 상처에 대해 명분을 부여하기 위한 그럴 듯한 성취가 필요했던 것일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편하게 살면 안 된다는 압박감도 있었던 것 같아.


이젠 자주 웃으면서 사는 게 잘 사는 것 같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면서. 네가 조금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어. 조금이라도 쉽게, 재밌게 살면 안 될 것만 같은 오래된 죄책감이 지금 네 삶을 무겁게 만들지. 너는 여전히 어린 시절 목격한 부모님의 우울을 기억하고, 여전히 불안해하고, 이번 주말에도 아침 일찍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책임감을 안고 버스에 올라타겠지. 아직 완전히 다음 시절로 넘어오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제 그 시절들과 조금씩 멀어지고 있어. 내가 그런 죄책감을 갖게 된 이유에 대해 어느 정도 명확히 알게 되는 계기가 있었거든. 또 부모님이 이제는 자주 웃을 수 있게 되셨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아. 그 웃음의 빈도가 차츰 늘어나면서 나는 깊이 안도했지만, 어딘가 마음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어. 아무도 가둬 놓지 않았는데 나만 혼자 고통 속에 갇혀 있는 느낌, 어느새 가족들은 저 멀리 가고 있는데 나 혼자 남아서 보이지도 않는 것들과 싸우고 있는 느낌.


이제는 뒤틀린 것들을 바로잡아보려 노력하고 있어. 여전히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가족들과 친구들과 그리고 나 자신과 더 다정하게 지내려는 마음을 귀하게 여기면서. 네가 지금 걱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들 나름대로 무사한 일상을 보내고 있고, 나도 그런 것 같아. 요새 스무 살에 해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못했던 것들을 소소하게 하나씩 해보고 있어. 집안 형편은 헤아리지 않고 적성 타령하는 언니가 서운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나도 한가롭게 적성 타령하는 이십 대 중반이 되어버렸네. 조금만 방향을 다시 탐색하고 제대로 걸어가 볼게.


그 사랑도 <8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오는 대사처럼 결국에는 추억으로 그쳐가고, 이따금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낼 수 있게 됐어. 너는 앞으로 몇 번 불쑥 찾아가 무작정 기다려도 보고, 다시 못 볼 거라는 예감에 엉엉 울기도 하겠지만. 그러니 지금은 충분히 그리워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 그리움은 온전히 너의 것이니까.


고마워. 그 시절은 분명히 지나가. 찬란하지는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어, 그렇지? 오랫동안 기다렸던 영화를 보러 혜화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던 때도 좋았고, 느긋한 오후의 햇살을 맞으며 경의선 숲길을 걷던 때도 좋았어. 로욜라에서 이런 저런 책을 읽다가 취향을 발견하고, 관심 있는 주제를 다루는 교양 수업을 찾아 듣고, 고향에서 함께 자란 친구들과 서울에서 만나 수다를 떨고.


15분 쉬는 시간 동안 K관에서 D관까지 발걸음을 재촉해 가면서, 다음 수업을 듣기 위해 또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바쁘게 각자의 목적지로 향해 가는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이 문득 벅차게 생각이 든 때가 있었지. 같은 요일마다 펼쳐지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차림새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비슷하지만 조금씩은 다른 일상의 풍경들. 막 어른이 된 사람들이 모여 생동감을 피워내는 그 교정에서, 이상하게도 이 시절이 노을처럼 저무는 상상을 했고, 세월을 따라 자연스럽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참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너의 오늘 하루도 그렇게 자연스럽고 편안하기를. 너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나도 잘 살아갈게. 안녕 은수야, 안녕.


2022.02. 겨울의 끝자락에서, 서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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