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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감이란 긴 터널을 무사히 지나온 20대의 나에게


(사진 출처: 최근우 동문)

무력감이란 긴 터널을 무사히 지나온 20대의 나에게


새내기 시절의 나를 돌이켜보면 ‘무력감’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재수를 해서 남들보다 출발이 늦었다고 생각했다. 재수 때는 여름방학에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가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리고 재수를 통해 21살에 서강대에 입학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감사하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서강대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반수를 했고 세 번의 수능 중 유일하게 납득할만한 성적을 받았음에도 더 좋은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다.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편입까지 준비했지만 또다시 실패했다. 어쩌면 재수 내내 매일 재수학원 가는 길에 서강대를 지나치며 ‘서강대 정도는 붙겠지’라는 오만한 생각을 할 때 서강대와 나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 듯하다. 20대 초반에는 몇 번의 대학입시에서의 실패로 스스로 루저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하나고에 입학해 경험해보지 못한 등수를 성적표에서 본 순간부터일 수도 있다. 그렇게 무력감은 고등학교 때부터 차곡차곡 쌓이고 재수를 하면서 심화되었다. 그 무렵의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없는, 의욕도 없는 식물 같은 인간이었다. 뭐든 하면 적당히 잘했지만 그런 애매한 재능에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애매한 재능들이 나를 무색무취의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원망했다. 그때 내 인생에 대한 내 태도는 ‘적당히 남들이 무시하지 않을만한 직업을 가져서 적당히 남부럽지 않을 만큼 살자’ 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이 현실적이고 어른스러운거라 착각했다. 그런 생각 끝에 CPA시험을 준비했다. 회계사는 전문직이면서 적당히 돈도 잘 벌고 남들도 알아주는 딱 적당한 직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패션 고시생으로 얼렁뚱땅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스스로 공부를 잘한다는 자각도 있고 어떤 시험이든 잘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이후로는 공부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다. 회계사 공부를 시작하며 그 어마어마한 공부량에 압도되었고 솔직히 스스로 붙을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없었다. 자신에 대한 확신도 없이 열심히 하지도 않았는데 붙을 리 없었다.


그렇게 공허한 인생을 살면서 몇 번의 연애를 했다. 운이 좋게도 내가 좋아했던 친구들과 연애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속 빈 강정이 하는 연애란 알맹이가 없었다. 주체성이 없는 상황에서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니 그 사람이 인생의 전부가 되었고 그런 모습이 매력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모두 좋은 추억으로 남았고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과 예쁜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매우 주체성 없고, 비관적이고, 의욕이 없던 삶을 살았고, 그러면서도 스스로 현학적이고 똑똑하다는 묘한 거만함 속에 살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아 노력한 거에 비해 적당히 나쁘지 않은 인생을 살아온 것 같다. 이런 내가 변하게 된 두 가지 계기는 독서와 독립이다. 한참 스스로 무색무취의 인간이라고 자각하고 폄훼하던 시기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다자키 쓰쿠루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러면서 무색무취라는 것도 하나의 개성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뭐 하나 뛰어나게 잘하는 것은 없지만 또 시작하면 못하는 것도 없음에 감사함을 느끼고 나를 긍정할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도 고무적인 변화이지만 책을 통해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보는 인식도 많이 변화했다. 한때는 조롱하고 외면했던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세상을 보는 시각이 긍정적이고 발전적으로 변할 수 있었다. 특히나 근 10년 간 무력감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온 내가 의욕적으로 변했고 성취하고 싶은 목표들이 생겼다. 지금 생각해보면 20대 초반의 나는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무기력했던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이룰 수 없다고 속단하고 스스로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이라 자기기만을 한 것 같다. 그런 자기기만과 무력감에 집안 분위기도 한몫했다. 어렸을 때 공부를 잘해서인지 나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가 컸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 흔히 생각하는 좋은 직업을 갖기를 바라셨다. 스스로 눈치를 안 보는 사람이라 믿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부모님의 기대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나는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이었다. 독립하고 보니 부모님조차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탐구하고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좋다. 이 세상에 나를 내놓고 키워주신 감사한 분들이지만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할 필요도 없다.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도 결국은 서로 다른 객체고 각자 행복한 인생을 살면 이상적인 관계라 생각이 든다.


‘새내기로 돌아가 더 많은 독서를 하며 사색하고, 조금 더 일찍 독립했다면 어땠을까’ 후회가 남는다. 긴 터널을 통과하듯 어둠 속에 끝없이 내면으로 침전하느라 이십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를 낭비한 것이 속상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우울했던 시절을 통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둠의 긴 터널을 엉금엉금 기어 무사히 통과해준 그 시절의 나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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