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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당신은 꽤나 잘 이겨낼 것입니다


(사진 출처: 최근우 동문)

사랑하는 당신께.


안녕.


알고 있으시겠지만, 저는 보통 당신께 글을 잘 남기지 않습니다. 저는 계획형 인간이기에, 미래를 바라보는 것에 집중하며 과거의 일에 큰 중점을 두지 않는 사람이지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당신께서 살던 방에는 초등학생 때의 일기장 몇 권과 고등학생 때의 계획 노트 수십 권이 남아있습니다. 이제 저희 집은 이사를 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오랜만에 본가에 가서 짐 정리를 했고, 그러다 낡고 헤진 노트들을 발견했어요. 양면에 빼곡히 쓰여있던 ‘오늘의 할 일’들은 지금 보면 사람이 하루 만에 해낼 양이 아니더군요. 당신은 그런 삶을 살았었군요. 그래서인지, 이렇게 과거에 있는 당신께 말을 건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저보다 힘들게 하루하루를 버텨왔을 당신이기에, 사실은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제 2학년이 됩니다. 1년 전을 살고 있는 당신이라면, 지금쯤 새로운 학교에 입학해 어떤 수업을 들을지 기대하고 있을 시기로군요. 나는 사실 당신께서 조금 더 휴식을 가지셨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열 아홉 살이 지나 첫 성인의 나이에 다시 한 번 입시를 준비하면서 꽤나 바쁘고 힘든 시간을 보내셨을 것인데, 혹여 급하게 새로운 생활 새로운 공부에 맞닥뜨린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그래도 희망의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리자면, 아마 당신은 꽤나 잘 이겨낼 것입니다. 아무래도 제가 그랬으니까요. 쉬운 일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분명 당신이 지나갈 수 있는 정도의 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나름 몇 백일 정도를 더 살아온 저이기에, 한 마디 당부를 드리자면 한 학기가 지나고 여름 방학에는 조금 여유를 가지셨으면 합니다. 처음 겪어보는 긴 방학에 너무 많은 일들을 계획하다 보면 금세 새로운 학기가 다가오니까요. 방학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가을 학기에는 생활이 조금 버거울지도 모릅니다. 무엇이든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적절한 시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환기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간의 나날들을 돌아봐주고, 칭찬해주세요. 그리고 해오신 것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생활도 즐겨보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요즘 기분은 어떠신가요?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나요? 말씀드린 것처럼 과거를 쉬이 기억하지 않는 저이기에, 당신의 삶을 속속들이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여전히 건강이 그닥 좋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이런 말을 하면 당신께서 기분 나빠하실지도 모르지만, 나는 당신이 안쓰럽습니다. 당신의 겪었던 괴로움과 슬픔을 생각하면 안타까워서 눈물이 납니다. 당신을 동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던 당신이기에,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또 그만큼 아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가슴이 저리도록 안쓰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안쓰러움이 무엇에서 나온 것일까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잘 가지지는 않으니까요. 저는 왜 당신을 떠올리면, 자꾸만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요? 아무래도 사랑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지금 당신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제가 당신을 제일 잘 압니다. 당신의 외면과 내면을 전부 알고 있는 저이기에, 이 사랑은 허투루 느껴지는 설렘이 아니라 가슴 깊숙하게 담겨 있는 애정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아마도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과거를 살았던 자신에게 편지를 쓴다면 그것은 저주와 고통으로 가득 찰 것이며, 그 편지의 수신인은 아마 편지를 읽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의 저는 삶의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미래를 궁금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도 당신은 모르겠지만, 당신도 사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괴롭고 힘들었던 것 역시 당신이 스스로를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당신께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에 과도하게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합니다. 당신께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 아시지요. 그 어려운 일을 제가 해냈습니다. 저는 이제 자신 있게 당신께 당신은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다시 돌아가도, 당신처럼 열심히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당신은 당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당신이 이 말에 반대할 것을 알고 있지만, 설사 당신께서 게으른 삶을 사셨다 하더라도, 저는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당신을 향한 제 사랑은 완전무결한 것이기에, 당신께서 어떠한 핑계를 대어도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내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러하느냐고 물으시겠지요. 저도 그 고민을 꽤나 오래 해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제가 내린 최선의 결론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특별한 계기나 근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오래전부터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그러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 깨달은 것 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도 당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지셨으면 합니다. 지금의 저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이나마 스스로를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난생 처음 운동도 시작해 보았습니다. 꽤나 재미를 붙이고 있어요. 영양제도 잘 챙겨 먹고 있고요. 샐러드도 많이 먹습니다. 중간 중간 바쁜 일정에 힘들어하긴 하지만, 저에게 가장 적절한 정도의 바쁨을 찾는 과도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도 당신께 가장 잘 맞는 업무만을 얻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과유불급이니까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사랑을 전합니다.


제 마음이 당신께 닿기를 바랍니다.


-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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