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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만나게 되는 소중한 사람들 모두에게 잘해주세요


(사진 출처: 최근우 동문)


안녕하세요. 저는 17년 전 지금 이맘 때 불안하고 초조한 눈빛으로 노고산 언덕길을 올라 첫 등교를 시작한 당신입니다.

대학생이 되었다는 설렘도 아주 잠깐일 뿐,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아 낯설기만 한 오피스텔 입구의 이질적인 향기와 풍경, 학교 정문 앞 횡단보도 너머의 무수한 인파, 그리고 옆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본인보다 훨씬 세련되고 성숙해 보이는 진짜 대학생처럼 보이는 사람들로 인해서 많이 주눅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와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합니다만, 당신과 나는 수줍음이 매우 많은 시골 소년이었으니까요. 서울 날씨는 또 왜 그렇게 추운 건지. 남쪽 지방은 3월이면 벌써 봄이라 꽃도 피고 따뜻하다 보니, 그 날씨를 생각하고 겨울 외투를 가지고 오지 않은 당신은 얇은 자켓을 입고 추위에 벌벌 떨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감기는 안 걸렸죠? 지금 나이의 나였다면 며칠은 몸살로 고생했을 겁니다. 역시 젊음이란 멋지네요.

전공 수업도 들어 보셨나요? 과에서 공동 구매한 소법전도 받으셨고요? 유감스럽게도, 그 무거운 물건은 앞으로 한동안은 계속 들고 다니셔야 할 겁니다. 무거운 법전을 수업에 들고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오기는 하지만, 슬프게도 당신이 수업을 듣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 일러요. 그래도 법전 들고 다니면 간지나고 멋지잖아요. 당신이 대학교에 갓 입학했을 당시에 제법 유행했던 말을 괜히 한 번 사용해 봤어요. 당신도 법전을 들고 수업에 들어가는 게 그렇게 싫지는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앞으로 들고 다녀야 하는 다른 법학 교과서와 비교하면 법전은 비교적 가벼운 편이거든요.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나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의 당신은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 성격도 아니고, 먼저 다가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경계를 쉽게 풀지 않기 때문에, 교우관계에 있어서 특별히 고민이 많을 겁니다. 그래도 학교를 다니다 보면,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될 거고, 재미있는 추억들도 쌓아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 만나게 되는 소중한 사람들 모두에게 잘해주세요. 진심을 다해서요. 소중한 사람들 중에는 먼 길을 떠나 영원히 못 보게 되는 사람도 있고, 여러가지 사정으로 자주 만나기 어렵게 된 사람도 있고, 인연이 되지 않아 이어지지 못한 사람도 있고, 지금까지도 본인의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 주는 사람도 있어요. 모두가 나의 젊은 날을 빛나게 해 주었던 소중한 사람들, 소중한 인연인데, 어린 마음에 진심을 다하지 못했던 것에 지금도 후회가 많이 남네요. 후회해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바로 지금의 나니까요. 그래도 이 편지에는 꼭 이 내용을 포함시키고 싶었어요.

그리고 또 중요한 건 학업이겠죠. 대학교는 공부하러 오는 곳이니까. 나름 모범생에다가 공부가 적성에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수재들이 많아서 당황스럽죠? 서강은 그만큼 대단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까요. 아마도 교양영어 시간에는 모두가 유창한 발음에 세련된 영어를 구사하고, 전공수업 시간에는 개념을 따라가기에도 벅찬 본인과는 달리 어렵고 고차원적인 질문을 교수님에게 물어보는 동기들도 있고 그럴 거예요. 그래도 결코 자신감을 잃지는 말아요. 솔직하게 말하면, 당신은 서강대의 수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성실하게 공부해서 당신이 어렸을 때부터 동경해 왔던 직업에 종사하고 있거든요. 대학에 와서는 공부를 그리 좋아하지 않게 된 당신과 내가 그래도 유년기의 꿈을 이룬 건 서강의 교육 시스템이 그만큼 탁월했기 때문이겠죠. 서강이 아직 어린 당신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해서 자랑이라고 미리 불러주었기 때문에 그만큼 동기 부여가 되었을 수도 있고요. 저는 학교의 자랑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조금은 더 노력을 해볼까 합니다. 당신이랑 미래의 우리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요.

앞으로 정말로 많은 일을 겪게 될 거예요. 소중한 것들을 잃기도 하고, 불완전하기에 남들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게 되기도 하고, 그토록 동경한 대상으로부터 더 멀어져 가면서 체념하게 되고, 이런 저런 이유로 좌절도 많이 하게 될 겁니다. 반면에, 기쁘고 즐거운 일도 많이 생길 겁니다. 그리고 그 기쁘고 즐거운 일들 중 대부분은 지금 당신이 성실하게 노력해 온 결과물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토록 많은 중압감과 시련을 이겨내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건 당신이니까. 그러니까 고개를 들고 자신감 있게 학교를 걸어봐요. 졸업하고 나서 와보니까 학교 캠퍼스가 그렇게 예쁜 줄 처음 알았어요. 주눅이 잔뜩 들어버린 당신이지만, 눈을 들어 보니 역시 서강은 멋진 곳이죠? 부디, 즐거운 새내기 생활을 즐기기를 바라요. 저도 먼 미래의 나에게 자랑스러울 수 있게 지금을 열심히 살아볼까 해요. 기회가 있으면 또 얘기해요. 이만 줄일게요.

17년 후의 당신이, 친애하는 과거의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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