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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는 새로움을 위한 자리를 만들테니


(사진 출처: 최근우 동문)


부끄러워 하지 말거라, 세상을 모두 가진 그대여.

하지만 괜찮다. 그대는 부끄러움을 직면할 수 있을테니.


돌이켜보면, 그대는 자신에게 쓰는 편지를 견디지 못하였지. 너는 타임캡슐에 넣는 편지조차 다른 아

이들처럼 쉽게 적지 못하였어. 주변의 등살에 떠밀려 못내 적을 때에는, ‘당신’이라는 말로 자신을 타자

화하기 일쑤였다. 너는 이 글을 보고도 코웃음 칠지도 몰라. 오만하다 하며 말이야.


하지만 오만한 존재는 그대였다. 공작새처럼 깃털을 부풀렸지만, 그 속에는 한낱 부끄러운 소년이 있

을 뿐이었지. 서울로 올라온 유학생. 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어. 그들을 깍쟁이라고 애써 깔보던

마음에는 촌놈의 부끄러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네가 가지지 못한 미소와 말주변을 가진 것만

같았어.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마냥 멀게만 느껴졌지.


부끄러움을 부담스러워 하지 말거라. 네 앞에 놓인 나날들은 부끄러움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연습이 될

것이야. 부끄러움은 그것을 인정했을 때 성장의 거름이 된다. 하지만 네가 질투하는 이들의 분위기를

마냥 따라하려 하지는 말거라. 참된 성장은 그대 내면이 마치 잘 익은 벼처럼 영글었을 때 비로소 가

능하단다. 그리고 그 어떤 쌀알도 똑같은 것은 없지.


조급해 하지 말거라, 세상을 모두 가진 그대여.

하지만 괜찮다. 그대는 조급함을 타이를 수 있을테니.


한 선생님이 알려준 글을 기억할테야.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 조급함은 불안과 두려움을 낳는다. 그 속에서는 결코 최고의 날들을 맞이할 수 없어. 너는 조

급함을 버려야 할지어다. 이 말을 들은 그대는 나에게 역정을 낼지도 모르겠다. 5년 후에는 뭐가 그리

달라졌기에 이리 시혜적이냐며 말이야.


하지만 잠시 속을 가라앉히고 들어주기를 바란다. 서울에서 살지 못해도, 그들보다 앞서나가지 못해도,

합격하지 못해도 네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단다. 너를 잡아먹는 것은 경쟁이 아닌, 조급함에

서 비롯된 걱정이야. 뒤쳐질까 두려워하는 웅크린 마음이지. 네가 이겨야 하는 사람은 동료가 아닌, 어

제의 너란다.


그대가 서강에서 맞이할 나날들은 마라톤이 아니야. 오히려 서핑에 가깝지. 파도가 높은 날에는 구름

에 스칠 듯 높이 올라간다. 이 순간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을 거야. 하지만 바다가 숨죽인 듯 조용한

날도 있단다. 해변에 마냥 앉아있어야 하는 그 시간을 슬퍼하지 말거라. 왜냐면 파도는 네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 대신 파도가 잔잔하면 네 주변을 살피며, 앞서나간 마음을 제자리로 옮기거라.


욕심내지 말거라, 세상을 모두 가진 그대여.

하지만 괜찮다. 그대는 버릴 수 있는 용기를 얻을테니.


너는 학창시절의 총명함을 잃지 않았다. 다만 무엇이든 잘 해야만 할 것 같은 욕심이 그대의 눈을 멀

게 한 것이지. 오이도의 석양도, 여의도의 아경도 욕심이 가득한 눈으로 본다면 아름다움을 놓치게 된

다. 삶은 이렇게 자그마한 아름다움의 조각들로 만들어져 있어. 그 조각들을 놓치지 않아야 한단다.


욕심은 돌덩어리 같은 존재야. 하나 둘 집기 시작하면, 어느새 너무 무거워져 앞으로 나갈 수 없다. 그

럴 때면 한적한 그대만의 강가로 가 물수제비를 띄워라. 힘껏 던지면 던질수록 너의 조약돌은 멀리 갈

거야. 그리고 그 궤적을 바라보며 생각하거라. 그대가 움켜잡은 조약돌은 곧 그 손을 벗어날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욕심이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말을 믿지 말거라. 모든 것은 너무 빨리 변하기에, 너의 욕심도 눈 깜

짝할 사이에 구닥다리가 된단다. 부푼 마음을 하루를 충만하게 살고자 하는 다짐으로 갈음하거라. 작

은 일상이 모여 만들어진 존재는 변화에 맞설 수 있어. 거친 바닷바람에도 무너지지 않는 제주의 돌담

처럼, 시간의 조각이 만든 자아는 세월의 풍파를 견딜 수 있지.


증오하지 말거라, 세상으로 모두 가진 그대여.

하지만 괜찮다. 그대는 사랑할 수 있을테니.


이 모든 것의 끝에서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까지도 진정 감사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대를 만난지

어언 5년이 흘렀건만, 애석하게도 그 방법은 깨우치지 못했단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너

는 진실된 감사에 가까워지는 길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울 것이야. 그 과정마저 온 힘을 다해 사랑하도

록 하여라.


네가 서강에 둥지를 튼 날, 기숙사에는 이런 현수막이 걸려 있었지.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해야

합니다. 당신도 행복하고 주위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 날 부모님은 이냐시오

성당에서 기도를 드렸어. 당신의 아들이 행복하기를 손 모아 바라셨단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행복할

수 없어.


무엇보다 네 자신을 사랑하거라. 빛나는 모습부터 쥐구멍에 숨어버린 뒷모습까지. 전부 그대일지어니

모두 끌어안아라. 가지지 못한 것을 손꼽는다면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더라.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

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 13:12)” 무엇보다 후회하는 너의 모

습마저 사랑하거라. 후회는 새로움을 위한 자리를 만들테니.


24번째 생일이 며칠 지난 오후에,

네가 맞이할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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