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최근우 동문)
새내기 시절의 나에게
안녕. 이제 갓 스무 살이 되었다며. 나는 막 이십 대의 중반에 들어섰어.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기도, 휘리릭 지나가 버린 것 같기도 하다. 어떤 한 때를 지날 당시에는 그 시간들이 너무 길게 느껴지는데, 지나고 보면 놀라우리 만치 짧은 순간이었던 것 같아.
대학 입학이 결정되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면서 괜히 짜증을 내는 나에게 엄마가 슬쩍 말해. ‘서울 가는 거 무섭지’, 라고. 나는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내가 무서워한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듣고 보니 그렇더라고, 너무 무섭더라고. 아무렇지 않다고 또 한번 틱틱 거리기만 하고서는 기숙사 방에서 혼자 보내는 첫날 밤에 살짝 눈물을 흘리고, 1학년 2학기에는 뒤늦은 향수병과 이것저것 겹친 일들에 매일 밤 집에 오는 길에 울어. 시간이 흐른 지금은 서울의 작은 방을 '우리집'이라고 부른다. 본가보다 여기가 마음이 편해.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아직도 '경상도에서 오셨죠?'라는 말을 듣지만 고향 친구들에게는 '서울 물이 들었다'며 조롱을 당하는 애매한 억양이 된다. 신기하지, 명확한 형체가 있지도 않은 것들이 스며들고 섞이고 변한다는 게. 그래서 무서워하던 곳이 편안해진다는 게.
첫 연애가 끝나고, 내가 뭘 잘못 했는지를 찾다가 그 사람의 미운 점을 찾기도 하다가 또 나를 탓하다가 '다시 연애라는 걸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슬퍼하게 돼.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유치하고 귀엽기만 한 생각이지만 당시의 너는 꽤나 심각해. 하지만 그 경험을 바탕으로 더 멋진 사람과 더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고, 그 때에만 경험할 수 있는 생생한 날 것의 감정들을 느꼈던 것에 은은한 감사를 느끼기도 하는 날이 언젠가 온다. 그러니까 힘들어도 잘 버텨주길 바라. 밥 안 먹고 울고 그러지 말고, 뭐라도 챙겨 먹으면서 지내.
네가 교환 학생을 떠난 유럽에서 평생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한국의 집에서는 아마도 우리 가족에게 가장 힘든 고비였을지도 모르는 일이 벌어지게 돼. 멀리 있는 너에게 아무도 알리지 않았고, 너는 그 사실을 귀국 후 여름에 우연히 알게 돼. 세상이 밉고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것도, 갑자기 말하는 것도 전부 미워. 마지막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즐겁기만 했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공공연히 말하던 내가 미워진다. 어느 밤에는 그냥 모든 게 무서워서 당시 남자친구를 안고 눈물만 흘리기도 해. 걔는 아직도 내가 왜 울었는지 모를거야. 그런데 그 시간도 지나간다. 아직도 떠올리면 눈물이 나긴 하지만, 굳이 애써서 떠올리지 않으면 잊고 살게 돼.
본격적으로 졸업 이후의 삶을 고민하는 시기가 찾아오고, 분명 많은 것을 하며 바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텅 빈 이력서 란과 자꾸만 떨어지는 면접들을 보며 점점 작아지게 돼. 나를 드러내고 증명하는 게 너무나 피곤하고 막막하게 느껴져. 그러다가 시험을 준비하기로 결심한다. 일 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너는 정말 많이 힘들어해. 중간에 오랜 연애를 끝내기도 해서, 마음 둘 곳 없이 고생을 좀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커피를 마시듯, 자려고 누우면 습관처럼 불안에 잠겨. 응원의 말들이 부담으로만 느껴지고, 차라리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라도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해. 그렇지만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면, 오늘이 와. 오늘의 너는 최종 합격을 확인했어. 너를 아는 모든 사람 중에서 네가 너를 가장 믿어주지 않았다는 것도 확인하게 돼. 다들 네가 잘 될 줄 알았다 더라고.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 불안을 내려놔. 조금만 덜 울자.
너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간단히 말해줬는데, 어떻게 들렸을지 모르겠네. 네가 뭔가를 바꾸길 바라서 하는 말이 아니니까 부담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하루하루를 넘기다 보면 여기 도착해 있을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밥 잘 챙겨 먹고 잠 잘 자면 된다. 여기에서의 내가 열심히 살고 있을게. 네가 쌓은 시간들 위로 또 뭔지 모를 하루의 조각들을 더하고, 한참 지나서 그 조각의 정체를 알게 되기도 하면서 잘 지내볼게.
지금의 너도 알고 있는 거지만, 앞으로의 너에게도 계속해서 힘이 되어주는 책의 문장을 남기며 이만 인사한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느냐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이다. 삶은 사람의 운명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각 개인에 따라 저마다 다르고 독특하다. 어떤 사람, 어떤 운명도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운명과 비교될 수는 없다. 고통 속에서 조차도 자기는 이 우주에서 유일하고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과 계속 살아남아야 할 책임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칫 약해지려는 순간들을 다잡고 남몰래 눈물을 감춰가며 엄청난 고통에 맞설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눈물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눈물이란 한 인간이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최고의 용기를 지녔음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지음, 정순희 옮김, 고요아침)
다음에 또 편지할게. 천천히 따라와.